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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이야기를 꺼내봅니다|남은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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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지나온 시간이 궁금해졌습니다. 남은결 스무 편 동안 오래 한 자리를 지킨 사람도, 늦게 다시 시작한 사람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를 쓰면서는 카메라가 떠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작 나는 내 시간을 얼마나 돌아봤을까 싶었습니다. 이제 내 쪽을 바라봅니다 오래된 사진을 꺼냈습니다. 예전에 사진 속 아버지는 나보다 젊었습니다 를 쓰며 사진 한 장이 지난 시간을 불러온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번 사진 속에는 교복을 입은 내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열다섯에서 열아홉이었습니다. 교복, 등굣길, 쉬는 시간의 웃음, 몰래 주고받던 쪽지까지 작은 장면들이 돌아왔습니다. 사십 년 만에 다시 같은 책상에 앉았습니다 의 오래된 교실처럼, 기억은 뜻밖의 순간에 지나간 시간을 통째로 데려왔습니다. 칠판 옆에 붙어 있던 시간표 과목 순서는 이제 흐릿하지만 시간표를 바라보면 종 치는 소리와 분필 냄새, 창가로 들어오던 햇살까지 떠오릅니다. 토요일에도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던 시절이라 한 주가 지금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습니다. 시 간 표 3학년 2반 교시 월 화 수 목 금 토 1 국어 영어 수학 국사 국어 영어 2 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남은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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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문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 기사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대단한 성공담도 아니었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신문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기 일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방송과 신문에서도 그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건넨 짧은 응원과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그의 말도 기사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저 역시 그 사람을 잊고 살았습니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생각나 이름을 검색했습니다. 오래된 기사 몇 개만 남아 있었고 새로운 소식은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날짜가 한참 지난 기사를 다시 읽다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소식이 사라진 것과 삶이 사라진 것은 달랐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도 한 사람의 하루는 다음 날 아침 다시 시작됩니다. 기사에는 다음 이야기가 없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분명 그다음 날이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떠난 뒤에도 하루는 계속됩니다 어딘가에서 아침밥을 먹고 일터로 향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와 웃고, 속상한 일을 겪고,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월급날을 기다린 적도 있었을 것이고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며 잠을 설친 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 기사에 등장했을 때 품었던 꿈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몇 번이고 다른 길을 찾아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

금이 간 그릇을 버리지 않는 사람 |남은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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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깨진 그릇을 들고 작은 공방을 찾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새것을 하나 사는 편이 훨씬 쉬워 보였습니다. 새로 사는 편이 더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대 위에는 금이 간 찻잔과 손잡이가 떨어진 컵이 놓여 있었습니다. 주인은 작은 조각을 하나씩 맞춘 뒤 손끝으로 틈을 확인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다시 떼어내고 처음부터 맞췄습니다. 내가 “새것을 사는 편이 더 싸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값 때문에 가져오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연 때문에 가져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작업대 옆 종이쪽지에는 누가 쓰던 물건인지, 어디가 깨졌는지, 어떤 부분은 꼭 남겨달라는 부탁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릇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깨진 것은 그릇이었지만 사람들이 다시 이어달라고 맡긴 것은 그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이 아니라 사연을 들고 왔습니다 주인은 어머니가 쓰던 밥그릇을 맡긴 사람도 있었고, 결혼할 때 받은 찻잔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만들어준 접시를 깨뜨리고 며칠을 고민하다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새것처럼 만들어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흔적을 너무 지우지 말아달라는 분도 있습니다. 그 자국까지 자기 물건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다가 바늘 끝에 사십 년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의 오래된 수선집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낡은 옷만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작업대 위의 그릇마다 누군가의 식탁과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금이 사라져야만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뒤 주인은 수선을 끝낸 찻잔 ...

일흔둘,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남은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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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운전면허 문제집과 연필이 놓여 있었습니다. 일흔둘의 어머니는 돋보기를 고쳐 쓰며 틀린 문제를 다시 풀었습니다. 일흔둘에 시작한 공부였습니다 “이 나이에 면허를 따서 뭐 하려고 그래요?” 가족들은 걱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갈 때마다 가족에게 부탁하는 일이 미안했다고 했습니다. “멀리 다니려는 게 아니야. 내 일은 내가 해보고 싶어서 그래.” 말은 담담했지만 문제집은 닳아 있었습니다. 표지판을 공책에 그리고 헷갈리는 문제는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장을 푸는 데도 오래 걸렸습니다. 외운 내용을 다음 날 잊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연필을 들었습니다. 늦게 시작해도 첫날은 생겼습니다 배우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일이었습니다. 나이는 시작을 막는 벽이 아니라 천천히 넘어야 하는 문이었습니다. 두 번 떨어지고도 다시 갔습니다 첫 시험에서 떨어진 날, 어머니는 말없이 문제집을 덮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괜히 시작했나 봐”라고 말했습니다. 가족들도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달랬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문제집이 다시 펼쳐져 있었습니다. 예순여덟에 공책을 펼쳐 공부를 시작했던 이야기 처럼, 늦은 도전은 잘하는 사람보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시험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는 것도 긴장하니까 안 보이더라.” 나는 다음에는 천천히 읽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틀린 문제만 따로 적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릴 때도 작은 수첩을 꺼냈고, 부엌 벽에는 자주 틀리는 표지판을 붙였습니다. 세 번째 시험 날짜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합격보다 기뻤던 한 가지 시험이 끝난 오후, 휴대전화...

기차에서 만난 할머니|남은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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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옆자리 할머니가 작은 봉지에서 귤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귤 하나가 말을 열었습니다 “하나 먹어. 집에서 많이 가져왔어.”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습니다. 할머니는 귤을 내 손에 살며시 올려놓았습니다. “기차에서는 뭐라도 먹어야 덜 심심하지.” 그 말에 웃음이 났습니다. 껍질을 벗기자 새콤한 향이 퍼졌고 낯설었던 옆자리가 금세 편안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어느 역에서 내리느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고향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이 자주 오지 못한다는 말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말을 건넨 것은 귤 하나였습니다 간단한 인사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호의가 닫혀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을 묻지 않은 두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시장에서 장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새벽 첫차로 물건을 떼러 다녔고 비 오는 날에는 가게에 빗물이 들이쳤다며 웃었습니다.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어. 자식들 밥 먹이는 생각밖에 없었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할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오래 접어둔 기억을 하나씩 꺼냈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가 다른 친절로 이어졌던 이야기 처럼 사람 사이의 마음은 거창한 준비 없이도 움직였습니다. 귤 한 조각과 들어주는 귀만 있어도 낯선 사람의 하루가 잠시 따뜻해졌습니다. 나도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친척집에 갔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그랬구나”라고 답했습니다. 오래 아는 사람에게 하지 못했던 말까지 편하게 나왔습니다. 내릴 때가 되자 인사가 짧아졌습니다 안내방송에서 할머니가 내릴 역을 알렸습니다. 할머...

비 오는 날 건넨 우산은 다른 친절이 되었습니다|남은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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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우산 없이 서 있던 학생에게 아주머니가 우산을 건넸습니다. 우산이 없던 학생 앞에 멈췄습니다 퇴근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정류장 안쪽까지 빗물이 들이쳤고 사람들은 젖지 않으려고 벽 쪽으로 붙어 섰습니다. 학생은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린 채 도로를 바라봤습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우산을 학생에게 내밀었습니다. “학생, 이거 쓰고 가.” 학생은 놀란 얼굴로 두 손을 저었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아주머니는 학생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여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금방 가. 비 더 오기 전에 어서 받아.” 학생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고, 정류장 사람들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습니다. 몇 천 원짜리 우산 하나였습니다 값으로 따지면 크지 않은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를 맞던 사람에게는 집까지 무사히 가게 해주는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친절은 오래 남았습니다 곧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학생은 버스에 오르기 전 돌아서서 아주머니에게 깊이 인사했습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창문 너머로 우산을 들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습니다. 늦기 전에 안부를 건넸던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 의 이야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말이나 큰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순간에 건넨 짧은 말과 작은 물건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 친절이 내 손으로 옮겨왔습니다 며칠 뒤 또 비가 내렸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우산 없이 신호를 기다리는 어르신이 보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안타깝게 바라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산을 어르신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습니다. “건너편까지만 같이 가실래요?” 어르신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지만 빗줄기가 더 굵어졌습니다. “저도 그쪽으로 갑니...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남은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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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맨 아래를 정리하다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 봉투에는 주소까지 적혀 있었지만 우표가 없었습니다. 주소까지 썼지만 보내지 못했습니다 낡은 책을 들어내자 누렇게 변한 봉투가 바닥으로 미끄러졌습니다. 받는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모두 내 글씨였습니다. 스무 해도 더 지난 편지였지만 누구에게 쓰려고 했는지 바로 떠올랐습니다. 한때는 하루가 멀다고 만났던 친구였습니다. 사소한 오해로 말다툼한 뒤 서로 먼저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편지로 적어두고도 마지막 순간에는 봉투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편지에는 대단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은 내가 심했습니다.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세 문장을 읽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편지를 다시 접는 데는 한참이 걸렸습니다. 보내지 못한 편지에 남아 있던 마음 미안함과 그리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지 않은 채 서랍 속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뤄둔 말에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왜 편지를 보내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말은 미뤄둘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꺼내기 어려워졌습니다. 사진 한 장을 통해 아버지의 젊은 날을 처음 바라보았던 사진 속 아버지는 나보다 젊었습니다 의 이야기처럼, 오래된 종이 한 장은 잊고 있던 사람과 그때의 마음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편지 대신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래된 연락처는 이미 바뀌어 있었습니다. 함께 알던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번호를 물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신호가 몇 번 가는 동안 그냥 끊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