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장부에는 돈보다 사람이 적혀 있었습니다|남은결 05
골목 끝에 작은 슈퍼가 하나 있습니다. 간판은 여러 번 색이 바랬지만 가게 문은 삼십 년 넘게 같은 시간에 열렸습니다.
계산대 옆에서 발견한 공책
음료수 하나를 계산하다가 계산대 옆에 놓인 낡은 공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이게 뭐예요?” 하고 묻자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외상 장부지. 아직도 쓰는 사람이 있어.”
요즘 세상에 외상 장부라니 뜻밖이었습니다. 동네 어르신 몇 분은 물건을 먼저 가져가고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한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부를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이름 아래에는 쌀 한 봉지, 우유 두 개, 두부 한 모처럼 작은 물건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금액 옆에는 날짜보다 ‘아들 오면’, ‘연금 받는 날’ 같은 짧은 메모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장부에는 물건값만 적힌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주한 이웃의 얼굴과 사정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허리가 굽은 어르신이 들어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지난달 것부터 계산해줘.” 주인은 돈을 세다가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이번 달 약값도 있어야지. 나머지는 다음에 줘.” 두 사람은 영수증보다 서로의 얼굴을 먼저 바라봤습니다.
“여기서 평생 본 사람들인데 뭘”
“혹시 안 갚으면 어떡해요?”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오히려 내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습니다.
“누가 어디에 사는지도 다 아는데 뭘 걱정해. 형편이 어려우면 조금 기다려주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 사람들이 함께 기다리고 이야기를 나누던 오래된 동네 극장이 떠올랐습니다. 극장과 슈퍼는 달랐지만 사람 사이의 시간을 품고 있다는 점은 닮아 있었습니다.
외상은 돈을 늦게 받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장부의 빈칸은 빚이 아니라 다시 올 사람을 기다리는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작은 가게가 오래 버틴 이유
이 가게가 삼십 년을 버틴 이유는 물건을 싸게 팔아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어른이 되어 돌아오는 동안 이름을 기억하고, 안부를 묻고, 사정이 생기면 기다려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된 외상 장부는 불편한 거래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쉽게 의심하지 않았던 골목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처럼 보였습니다.
가게를 나오며 뒤를 돌아보니 주인은 다시 장부를 계산대 옆에 놓았습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이름 아래에는 물건값보다 기다려주는 마음이 먼저 적힐 것 같았습니다.
오래된 가게를 지켜온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 아침 골목을 쓸며 이웃에게 받은 마음을 돌려준 어르신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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