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도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남은결 01

매표소 앞에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간판의 글씨가 벗겨진 작은 극장이 있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주말이면 매표소 앞에 긴 줄이 생겼습니다. 유리창 안쪽에서 건네받은 종이표는 잃어버릴까 손바닥에 꼭 쥐었습니다. 표를 사는 데도 순서가 있어서, 앞사람이 몇 자리를 사는지 세어보며 내 차례를 가늠하던 기억도 납니다. 매표소 유리창엔 늘 김이 서려 있어 안이 흐릿하게 비쳤습니다.

영화보다 먼저 시작되던 이야기

극장 입구 옆 나무판에는 늘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상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극장에 가는 날은 영화만 보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골목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나누어 먹고, 포스터를 보며 다음에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사십 년 만에 다시 이름을 불러준 친구도 사실 그 시절 골목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우리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상영관 앞 매점에서 파는 오징어와 사이다 냄새도 그 시절 풍경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그 시절 영화표 한 장에는

기다림과 약속, 친구의 웃음과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길까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불편했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래된 의자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습니다. 앞사람의 머리에 화면이 가려지고, 필름이 끊기면 객석 곳곳에서 탄식과 야유가 함께 터졌습니다. 그래도 같은 장면에서 함께 웃고 우는 동안만큼은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져도 사람들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조금 더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출구를 나서면서도 방금 본 장면을 두고 옆 사람과 한마디씩 주고받았습니다.

사라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동네 극장은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은 편한 좌석과 선명한 화면을 찾아 큰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날 다시 찾은 극장의 매표소는 닫혀 있었고, 포스터가 붙었던 벽에는 임대 안내문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제야 사라진 것이 건물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던 어느 하루도 결국 이렇게 사라진 풍경을 다시 찾아 나선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같은 시간을 기다리던 풍경과, 영화를 본 뒤 결말을 이야기하던 목소리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극장에는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는데, 매표소 옆에 서서 표를 찢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같은 얼굴을 몇 년씩 보다 보니 나중엔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작은 친절들이 모여 그곳을 단순한 상영관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다시 만나는 오래된 극장

한국영상자료원은 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의 자료를 모아 1980~90년대 극장가의 풍경과 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종로3가 트라이앵글 극장가' 기록 보기

지금 돌아보며

지금은 휴대전화 하나만 열어도 언제 어디서든 혼자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편리해졌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어둠을 나누고 불이 켜질 때까지 같은 이야기에 머물던 시간은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래된 극장을 기억하는 일은 낡은 건물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가까웠던 우리와 그 시절의 공기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빛바랜 사진 속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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